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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에 충실하자 무인양품

category 경제이야기 2020. 3. 24. 17:02

아버지는 오랜 기간 카피라이터로 사셨다. 출판업으로 인생 노선을 변경하신 후에도 늘 당신의 아이덴티티는 광고인이셨다. 그만큼 광고일을 즐기셨다(본인 표현으로 '미치셨다'). 아버지의 직업병은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광고 카피를 쓰실 때면 꼭 나와 동생을 불러 의견을 물으셨다(서로의 의견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따로 부르셨다). 이 안이 좋니, 저 안이 좋니? 이게 왜 더 좋니? 다시 한번 봐볼래? 유대인들은 부모와 자식이 밥상머리에서 경제와 정치를 논한다는데 우리 집의 주제는 광고와 브랜드였다. 최초, 전략, 차별화, 잭 트라우트, 오길비 같은 단어들이 반찬으로 올라왔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결국 대를 이어 광고밥을 먹고 산다.

  아버지에게는 독특한 습성이 하나 있으셨다. 브랜드 로고가 드러나는 옷은 입지 않으셨다. 로고가 없거나 아주 작아야 맘에 들어 하셨다. 브랜드를 팔아야 하는 카피라이터가 브랜드 옷을 멀리하는 아이러니. 아버지는 브랜드를 만든 사람의 의도가 빤히 보인다고 하셨다. 브랜드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고, 본인이 광고판 역할을 하는 게 싫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브랜드 없는 브랜드' 무인양품을 좋아하신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브랜드라는 거품을 걷어낸 무인양품의 콘셉트를 아버지는 놀라워하셨다. 대단한 철학이라고 생각하셨다. 결국 무인양품은 밥상머리 대화에 늘상 오르는 브랜드가 됐다. 일본으로 가족 여행을 갈 떄면 긴자와 신주쿠에 있는 무인양품 매장에서 상당 시간을 머물렀다. 현장학습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양손에 쇼핑백을 한가지 들고 나왔다.

 

 

    

     무인양품의 탄생

 

 

무인양품은 1980년 일본 슈퍼마켓 체인 세이유의 PB로 출발했다. 앞서 PB 상품을 내놓은 경쟁사 다이에, 자스코, 이토요카도에 비해 늦은 출발이었다. 판도를 뒤엎을 차별화 포인트가 필요했다. '본질만 남긴다'라는 무인양품의 콘셉트가 그래서 나왔다. 다른 브랜드들이 하나라도 더하려 할 떄, 우리는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떄까지 뻬겠다는 선언이었다.

  당시는 일본의 버블경제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시기였다. 화려하고 비싼 제품일수록 인기가 좋았다. 그리고 '브랜드'가 잘 팔렸다. 브랜드는 소비의 근거이자 프리미엄이 붙는 요인이었다. 브랜드 로고가 크게 박혀 있는 제품이라야 가치를 인정받았다. 무인양품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자 했다. 조용히 반란을 시작했다.

  브랜드명을 무인(도장이 찍혀 있지 않은)양품(좋은 품질의 제품)으로 지었다. 브랜드의 시대에 브랜드를 없애버렸다. 제품에서 브랜드명을 뺴버렸다. 무색무취한 디자인으로 제품을 둘렀다. 패키징은 간소화했다. 아트 디렉터였던 다나카 잇코의 주도로 유명 모델을 쓰지 않고 자연과 비움을 강조한 광고를 내보냈다. 무인양품은 나지막하게 외쳤다. 껍데기는 가라. 본질이 중요하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브랜드들 사이에서 무인양품은 홀로 튀었다. 무인양품의 '조용한'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렸다.

  무인양품은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브랜드였다. 사람들은 무인양품을 보면서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됐다. 즉, 무인양품의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이 브랜드의 철학에 동참하는 일이었다. 무인양품식 간소함을 지지한느 소비자들이 늘어갔다. 무인양품 제품만 사용하는 무지러들이 생겨났다.

  무인양품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남다른 철학을 발신하는 아이콘으로 우뚝 섰다. 1989년에는 모기업 세이유로부터 독립했다. 1995년에는 일본 증시에 상장됐다. 일본의 경제 성장률이 0%대에 그치던 1991년부터 2000년까지의 '잃어버린 10년' 동안에도 무인양품은 홀로 성장했다. 이 기간에만 매출은 4.4배, 경상이익은 107배 증가했다. '무인  신화'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브랜드를 없앴떠니 가장 강력한 브랜드가 됐다. 역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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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을 잃었을 때

 

 

"기본으로 충분하다."

  대한민국 축구계의 레전드 이영표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책 《말하지 않아야 할 떄: 이영표의 말》 첫머리에서부터 기본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보통 저자의 가장 중요한 생각이 맨 앞에 배치되는 법이다).

 

     "축구 경기에서 실점의 95%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축구의 기본을 최소한 다섯 차례 이상 지키지 않았을 때 발생합니다. 세계적 수준의 수비수가 되는 조건 중 하나는 축구의 기본, 그 기본을 철저히 지키는 평범함에 있습니다. 스포츠에도, 우리 삶에도 기본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기본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무인양품도 초창기에는 기본을 지켰다. 고객의 필요를 고민했다. 품질에 전력을 기울였다. 매장에서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때 무인양품은 이겼다.

  위기의 전조는 무인양품이 중시에 상장된 1995년부터 나타났다. 무엇이든 만들기만 하면 팔려나가던 때였다. 회사의 매출과 이익이 매년 급격히 증가했다. 무인양품은 샴페인을 터뜨렸다. 무리하게 매장을 늘렸다.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고 브랜드의 내실을 다지기보다 수익을 높이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 무엇보다, 무인양품 직원들의 열정이 사라진 것이 가장 큰 위기였다. 더 나은 제품을 만들려는 열의가 증발했다. 1990년데 초만 하더라도 일본 산간 지역을 샅샅이 돌며 소재를 찾던 직원들이 기계적으로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제품에 담긴 '혼'이 사라졌다. 편 가르기와 줄 서기 등 사내정치도 횡행했다. 그렇게 무인양품은 기본을 지키는 법을 잃어버렸다. '무지다움'의 상실이었다. 브랜드가 흔들렸다.

  더욱이 외부에서는 유니클로, 니토리, 다이소 등 가성비를 내세운 업체들이 무인양품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왔다. 무인양품과 비슷한 제품을 30% 정도 저렴하게 출시했다. 무인양품은 가격 경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갔다.

  기본을 지키지 않는 브랜드에서 소비자들의 마은이 떠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무인양품의 실적이 곤두박질쳤다. 2001년에 38억 엔(약 400억 원) 적자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4,900억 엔이었던 회사의 시가총액이 1년 새 6분의 1가량인 770억 엔으로 떨어졌다. 무인양품은 이제 끝났다는 소리가 나왔다. 기본을 상실한 대가는 너무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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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기본으로

 

 

무인양품은 배수진을 쳤다. 리더십을 교체했다. 사업부장이던 마쓰이 타다미쓰가 대표이사로 승진했다. 유명 디자이너 하나 켄야를 아트디렉터로 영입했다. 2명의 구원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무인양품의 수술이 시작됐다. 그동안 무인양품이 소홀히 해온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타다미쓰 대표는 무인양품의 체질을 바꾸는 작업에 돌입했다. 전국의 매장을 돌며 직접 점장들을 만나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100억 엔 상당의 불량 재고를 소각했다. 적자 매장의 문을 닫았다.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와 협업하는 등 경쟁력이 떨어진 무인양품의 제품력을 끌어올리는 데 힘을 쏟았다.

  타다미쓰 대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직원들이 지켜야 할 행동 수칙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무지그램>이라는 메뉴얼북을 발간해서 전 매장에 배포했다. 매장에서 일하는 방식을 표준화하기 위함이었다. 상품 진열법, 고객에게 인사하는 법, 잔돈 주고받는 법까지 이 책에 모두 담겨 있었다. 그 덕에 전 매장의 직원들이 일관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베데랑 직원이 갑작스럽게 퇴사해도 업무 공백이 발생하지 않았다. <무지그램>만 있으면 새로 온 직원이 그 자리를 거뜬히 메울 수 있었다.

  <무지그램>은 무인양품의 직원들이 지켜야 할 '기본'이었다. 맨 앞 페이지에는 각각의 작업이 갖는 의미와 목적이 제시돼 있었다. 각 수칙을 유연하게 해석해서 자신에게 맞게 체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려는 의도였다. 직원들이 <무지그램>에 명시된 기본을 지키면서부터 무인양품 매장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트 디렉터 하라 켄야는 무인양품 브랜드가 지켜야 할 기본을 돌아보았다. 먼저 이 브랜드에 질물을 던졌다. 무인양품은 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가.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해야 하는가. 하라 켄야가 찾은 답은 '이것으로 충분하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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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본질만 남긴다'의 하라 켄야식 해석이었다. 무지다운 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분명한 기준접이었다. 무지다운 제품은 단순히 심플한 디자인을 의미하지 않았다. 기분 좋은 생활을 돕는 최소한의 것이자, 생활의 기본이 되는 제품이었다. 한마디로, 본질에 충실한 제품이었다. 너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것만으로 충분한' 제품이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필요 없는 상품은 만들지도 팔지도 말자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것이 좋다', '이것을 꼭 사야 한다' 같은 말과는 결이 달랐다.

  하라 켄야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를 무인양품 브랜드가 지켜야 할 기본으로 삼았다. 디자인에 개성을 담지 않았다. 필연성 없는 파격을 지양했다. 디자이너 채용 공고에는 '디자인을 하지 않는 디자이너 모집'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두 리더의 지휘 아래 무인양품은 경영과 부랜딩의 기본을 정립하고 이를 철저히 지켜나갔다. 그때부터 무인양품이 다시 팔리기 시작했다. 최악의 적자를 기록한 2001년 이듬해부터 흑자로 돌아섰고, 이후 매년 성장세를 이어갔다. 지금은 3,795억 5,100만 엔(약 3조 8,000억 원)에 달한느 매출을 올리는 브랜드로 성장했다(2017년 기준).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900개가 넘는 매장을 운영한다. 무인양품이 부활하는 데는 복잡한 공식이 필요할 것이 아니었다. 기본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했다.

 

 

    

     무지다움 찾기

 

 

'무지다움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오랜 기간 무인양품 내부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숙제 같은 거였다. '본질만 남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말들도 어찌 보면 추상적인 슬로건이었다. 직원마다 해석에 차이가 있었다. 무지다움이 구현된 실체를 보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였다. '파운드 무지'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세계 각지에서 무지다운 물건들을 발견한 후에 역으로 무인양품의 정체성을 찾아보겠다는 취지였다.

  파운드 무지는 시대의 필요를 읽은 프로젝드이기도 했다. 시중에는 특색 없는 공산품들만 판을 치고 있었다. 나름의 고유성을 간직한 물건들이 점점 사라져 갔다. 이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무인양품은 자신들의 사명을 슬로건에 담았다.

  '시대와 국경을 넘어, 무인양품을 찾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무지다움을 찾는 여행을 시작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될성 부른 물건을 발견했다. 생산지를 직접 방문해서 탄생부터 완성까지 세밀하게 들어다보는 과정을 거쳤다.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간소하면서도 쓰임새가 확실한 '무인양품스러운' 아이템들이었다. 한국 담양에서는 죽세공품을 발굴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서는 밀가루를 담는 포대, 일본 아오야마현에서는 사과 상자를 발견했다. 쓰임이 특정 지역에 한정되어 있던 아이템이었다. 이를 현대적으로 개량하여 출시했다.

  파운드 무지를 이끄는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는 "아무도 상품화하지 않을 만한 것을 발견해 제품으로 만드는 게 파운드 무지의 저력"이라고 했다. 더는 찾는 사람이 없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전 세계 특산품들이 파운드 무지 프로젝트를 통해 생명을 연장했다.

  파운드 무지의 첫 번째 단독 매장은 도쿄 최고의 부촌 아오야마에 생겨났다. 30여 년 전부터 이 자리에 있던 무인양품 1호점을 리모델링한 공간이었다. 아오야마는 꼼데가르송, 샤넬, 브랜드들이 집결한 지역이다. 파운드 무지의 매장은 존재만으로 이질적인 풍경을 연출햇따. 세련된 명품족들 사이에 끼어 있는 의식 있는 시골 청년의 모습이었다.

  파운드 무지 매장은 존재 자체가 메시지였다. 여기 전 세계에서 발굴해 온 오리지널들을 보라고, 진짜배기 명품이란 이런게 아니겠냐고. 이것이 무지다움이라고 고객들은 기대감을 안고 파운드 무지 매장을 찾았다. 오늘은 또 어느 나라에서 가져온 신선한 아이템을 볼 수 있을까. 다른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도 일본 기업이 찾은 세계 각국의 '잇템'들을 보러 왔다. 무지다움을 경험했다. 무지다움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파운드 무지 프로젝트의 위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무인양품과 비슷한 정체성을 지닌 제품들을 계속해서 찾다 보니 무지다움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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